8세기 말-9세기 초 발해 왕위 계승의 위기와 정치적 격변
1. '해동성국' 이전, 25년간의 혼란기
발해는 제2대 무왕(武王)과 제3대 문왕(文王) 시기를 거치며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전성기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793년, 56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발해의 안정을 이끌었던 문왕이 서거하면서, 국가는 전례 없는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문왕 사후부터 818년 제10대 선왕(宣王)이 즉위하기까지 약 25년간, 무려 6명의 왕이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짧은 재위 기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왕위 계승 원칙이 무너지고 지배층 내의 권력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본 글은 바로 이 25년간의 혼란기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왕위 계승 과정을 심층적으로 추적하고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과 양상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내부적 격동이 발해의 대외 관계 및 국가 정체성 표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기나긴 혼란의 서막을 연 사건은 문왕 사후 발생한 최초의 왕위 계승 파행, 즉 방계 혈족이었던 대원의(大元義)의 비정상적인 즉위였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의 등극과 몰락 과정을 통해 발해 왕실이 마주한 첫 번째 균열의 실체를 살펴보겠습니다.
2. 문왕 사후, 혼란의 서막: 대원의의 찬탈과 몰락
장기 집권하던 문왕의 서거는 그 자체로 큰 충격이었으나, 위기는 그 이전에 시작되었습니다.
792년 문왕의 딸 정효공주가 사망한 이후, 불과 수개월 사이에 후계자로 유력했던 대굉림(大宏臨)과 문왕 본인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기 집권한 국왕과 공식 후계자가 거의 동시에 사망한 이 사건은 발해 왕실에 극심한 권력 공백을 야기했으며, 이는 발해 역사상 최초의 심각한 왕위 계승 위기로서 이후 25년간 이어질 정치적 혼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비정상적 계승과 찬탈의 가능성
문왕 사후, 왕위는 그의 직계 자손이 아닌 족제(族弟, 일가 동생) 대원의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계승이었습니다.
당시 왕위 계승 후보로는 태자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大華璵)와 문왕의 다른 아들들인 대숭린(大嵩璘), 대영준(大英俊), 대정한(大貞翰) 등 정통성 있는 직계 후손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계인 대원의가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의 즉위가 정상적인 절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모종의 정권 쟁탈, 즉 찬탈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특히 그의 즉위는 문왕 말기 동경(東京) 천도를 주도했던 '동경파' 귀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결과물로 분석되며, 이는 단순한 개인의 야심을 넘어선 파벌 간 권력 투쟁의 정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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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5경 |
폭정과 취약한 정치적 기반
대원의의 통치는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료에 따르면, 그의 통치는 "시기심이 많고 성질이 포악"했으며 "모질고 폭정을" 일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잔혹한 성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방증합니다.
정통성 없이 권력을 장악한 그는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폭압적인 통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는 지배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국인(國人)'에 의한 피살과 그 의미
결국 대원의는 즉위한 지 수개월 만에 '국인(國人)', 즉 발해의 귀족 세력에 의해 피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는 당시 발해 지배층 내부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첨예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귀족들이 직접 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 이 사건은, 문왕 대까지 공고했던 왕권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 시기 사료에서 ‘국인’은 대체로 국가 운영의 중심에 있던 유력 귀족층(중앙 지배층)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즉 대원의의 최후는 “왕이 폭정을 해서 민중 봉기가 났다”라기보다, 왕권을 옹립하고도 다시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강한 귀족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해’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왕이 사라지면 국가가 무너지느냐, 아니면 즉시 새 왕을 세우고 질서를 재가동하느냐.
발해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곧 “발해의 권력은 왕 한 사람의 개인 지배가 아니라, 귀족 집단의 합의와 충돌 속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내분기는 “왕이 약해졌다”로만 설명하면 반쪽짜리 입니다.
정확히는 왕을 만들고도, 왕을 지울 수도 있는 정치 구조가 표면 위로 튀어나온 시기였습니다.
대원의의 죽음으로 혼란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이는 기나긴 내분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문왕의 적손인 성왕(成王)이 즉위하고 수도를 상경(上京 현 중국 영안시)으로 되돌리는 등 정통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위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3. 단명한 왕들의 시대: 거듭되는 왕위 계승의 불안정
대원의의 찬탈과 몰락 이후에도 발해의 정치적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왕(成王)을 시작으로 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들이 짧은 재위 기간을 거치며 연이어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혼란기를 이해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 중 하나는 연호(年號)의 변화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연호는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 시대다”라는 정권의 선언문에 가깝습니다.
발해는 이 시기에 연호가 유난히 빠르게 바뀌게 됩니다.
성왕은 상경으로 환도한 직후 ‘중흥(中興)’을 내걸었습니다.
강왕은 ‘정력(正曆)’, 정왕은 ‘영덕(永德)’, 희왕은 ‘주작(朱雀)’, 간왕은 ‘태시(太始)’를 사용했습니다.
이건 한마디로 “새 질서, 새 출발”을 반복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새 출발’이 계속 필요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메시지입니다.
정치가 안정돼 있었다면, 굳이 매번 ‘리셋’을 선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간왕이 즉위하며 ‘태시(太始, 큰 시작)’를 내세웠다는 점은 상징적입니다.
이름 자체가 “이전과 다르다”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큰 시작’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끊겼고, 곧 선왕이 다시 ‘건흥(建興)’으로 연호를 고치며 새 판을 깔았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연호는, 왕의 짧은 재위 기간과 함께 정권이 얼마나 자주 교체되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정통성을 포장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압축 기록입니다.
3.1.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정통성 회복 노력과 그 한계
• 성왕의 정통성 회복 시도와 좌절
대원의 피살 후, 문왕의 적손인 성왕(成王, 대화여)이 즉위한 것은 무너진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가 즉위 직후 단행한 상경(上京) 환도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보였습니다.
이는 대원의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동경파 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통적인 귀족 세력의 중심지인 상경으로 복귀함으로써 '상경파'의 정치적 승리를 공고히 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재확립하려는 명백한 의도였습니다.
이때 ‘수도’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귀족과 군사·물자·인사권이 모이는 권력의 플랫폼이었습니다.
문왕 말에 동경으로 옮겼다가 성왕 때 다시 상경으로 돌아온 흐름은, 수도 이전이 곧 정치 질서 재편과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물론 “동경파 vs 상경파”라는 말은 후대 연구에서 설명을 위해 쓰는 틀이어서, 실제로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논쟁).
다만 최소한 확실한 건, 성왕의 상경 환도(794년)는 “이전 체제와의 단절”이라는 강한 신호였고, 이후 상경이 멸망 때까지 수도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 선택은 일회성 조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왜’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왜 그 많은 정책 중에 “수도”가 먼저 움직였을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왕이 바뀌면 관직이 바뀌고, 관직이 바뀌면 사람의 줄이 바뀝니다.
수도는 그 ‘줄’을 한 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성왕은 '중흥(中興)'을 이루려던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곧 사망하여, 혼란을 종식시키지 못했습니다.
• 강왕의 상대적 안정기와 잠재된 불안
성왕의 숙부이자 문왕의 아들인 강왕(康王, 대숭린)은 15년간 재위하며 상대적인 안정기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시호 '강(康)'이 암시하듯, 그는 흐트러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즉위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강왕 스스로가 즉위 초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의 처지를 "구차히 연명하다가(苟且延命)"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신하들이 "의로움에 감복하여 뜻을 바꾸고 감정을 억제하니," 마침내 "조정의 기강이 옛날과 같이 되었고, 영토도 처음과 같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내분의 틈바구니 속에서 힘겹게 왕권을 쟁취했으며, 이후 반대 세력을 포용하여 질서를 회복했음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강왕 시대의 표면적 안정 이면에는 여전히 심각한 불안 요소가 잠재해 있었습니다.
1. 지연된 부고(訃告)와 미정(未定)의 시호: 강왕은 문왕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일본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심지어 그때까지도 문왕의 시호(諡號)를 정하지 못해 '조대행대왕(祖大行大王)'이라는 임시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왕의 시호조차 결정하지 못할 만큼 내부 사정이 복잡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2. 중단된 외교 관계: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신 파견을 허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거의 10년 가까이 사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강왕이 이룩한 안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내정 불안에 휩싸였음을 시사합니다.
3.2. 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 끝나지 않은 내분
강왕 사후, 발해의 왕위 계승 불안은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고착화되었습니다.
강왕의 아들인 정왕(定王), 그리고 그의 동생들인 희왕(僖王)과 간왕(簡王)이 연이어 짧은 기간 재위하다 사망한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희왕 재위 시기의 정치적 단절은 815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 왕효렴(王孝廉)의 발언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불과 3년 전 정왕 대의 일에 대한 일본 조정의 추궁에 대해 "세월이 흐르고 임금도 바뀌어 전번의 일을 알 수가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가 없다는 변명을 넘어, 희왕의 즉위 과정에 이전 시대와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거대한 정치적 변동, 즉 또 다른 형태의 정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전임 왕의 치세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이 태도는 당시 발해의 정치 상황이 얼마나 지리멸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간왕(簡王)은 '태시(太始)'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새로운 시작을 천명했지만, 그 역시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25년간 이어진 내분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발해의 중앙 정치 체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 극심한 정치적 불안은 발해의 대외 관계와 국가 정체성 표출 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4. 격동기 발해의 대외 관계와 고구려 계승 의식
극심한 내분 속에서도 발해의 외교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치적 위기는 발해의 대외 관계 양상과 국가 정체성의 표출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취약한 왕권을 보완하고 분열된 내부를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교와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4.1. 외교 문서에 드러난 내분: 대일(對日) 및 대당(對唐) 관계
• 내정의 거울, 대일(對日) 관계
당시 발해와 일본 간에 오고 간 외교 기록은 발해 내부의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강왕이 문왕의 사망을 2년이나 늦게 통보한 사실이나, 희왕 대의 사신 왕효렴이 "임금이 바뀌어 전번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답변한 사례는 외교 관계가 어떻게 내정의 거울 역할을 했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외교 의례의 파행과 소통의 단절은 그대로 발해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권력의 단절성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 정통성 확보를 위한 대당(對唐) 관계
이 시기 왕들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당(唐)과의 관계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왕위 찬탈자였던 대원의와 내분 속에서 힘겹게 즉위한 강왕은 모두 당에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冊封)을 받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이라는 외부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국내의 반대 세력을 견제하려는 핵심적인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특히 강왕은 사회가 안정되자 문왕 다음으로 많은 책봉을 받으며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4.2. 고구려 계승 의식의 강조와 그 정치적 함의
이 시기에 나타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였던 강왕 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대내외적으로 집중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입니다.
1. 일본의 인식: 798년 일본이 발해에 보낸 국서에는 "대씨(大氏) 왕실이 나라를 다시 열었다(大氏王室 再開國家)"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를 부흥시킨 국가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일본 학자의 기록: 797년 완성된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 상표문에는 발해를 가리켜 고구려 계통을 의미하는 '맥종(貊種)'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발해의 자기 표명: 798년 발해 스스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高氏(고구려 왕실)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극심한 분열기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조되었을까요?
이는 단순한 역사 인식의 표출을 넘어,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데올로기적 행위였습니다.
위태로운 왕권을 잡은 강왕에게 '고구려 계승'이라는 거대 담론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 내부 결속 강화: '고구려의 후예'라는 공동의 정체성을 내세워 분열된 지배층을 하나로 묶고, 내분을 종식시키기 위한 통합의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 왕권의 정통성 확보: 발해 왕실을 고구려 왕실의 정통 후계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찬탈과 내분으로 훼손된 왕권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발해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정체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25년간의 길고 지리멸렬했던 혼란은 이제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통해 마침내 종식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왕 사후 내분기의 흐름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문왕 사망(793) → 대원의 즉위 후 피살 → 성왕 즉위 및 상경 환도(794) → 강왕의 상대적 안정(정력 연호) → 정왕·희왕·간왕의 단명과 단절감 누적 → 선왕 즉위(818)로 왕계 전환.
이 서사에서 반복되는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정통성.
귀족.
그리고 ‘새 시작’의 과잉 선언.
5. 혼란의 종식과 선왕(宣王) 시대의 개막
793년 문왕의 서거로부터 818년 선왕의 즉위까지, 발해의 25년은 '왕위 찬탈, 귀족에 의한 시해, 단명한 왕들의 연속, 그리고 정통성 위기'로 규정할 수 있는 극심한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거듭된 내분은 발해의 중앙 정치 체제, 특히 안정적인 왕위 계승 원칙에 심각한 균열을 가져왔고, 국력을 소진시켰습니다.
이러한 지리멸렬한 상황을 종식시킨 인물은 문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혈족, 즉 고왕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손 선왕(宣王, 대인수)이었습니다.
그의 즉위는 25년간 이어진 무왕과 문왕의 직계 후손 중심의 왕위 계승 구도를 종식시키고, 대야발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혈통이 왕권을 장악하는 중대한 정치적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선왕은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발해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마침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최전성기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파행과 혼돈으로 점철되었던 8세기 말-9세기 초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발해가 더 큰 도약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성장통이었던 셈입니다.
이 글은 발해(渤海) 문왕(文王) 사후의 왕위 계승 혼란을 다룬 것으로,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일본 측 기록(예: 《속일본기(續日本紀)》)과 국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
서술 과정에서 사료가 짧거나 표현이 거친 대목은 맥락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을 정리했으며, 단정이 어려운 부분은 (전승)/(논쟁)/(추정)으로 구분해 읽으시기 바랍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한자·원어를 함께 표기해 의미 혼동을 줄였습니다.
After King Mun died in 793, Balhae entered a 25-year succession crisis in which six kings rose and fell.
A collateral relative, Dae Wonuui, took the throne despite surviving direct heirs and was soon killed by aristocratic elites, signaling a weakened kingship.
Seongwang returned the capital to Sanggyeong to reclaim legitimacy but died early.
Kangwang restored order; sources suggest danger.
After him, Jeongwang, Huiwang, and Ganwang reigned briefly.
Even amid turmoil, Balhae used diplomacy with Tang and Japan to bolster authority and stressed Goguryeo inheritance to bind factions.
In 818 Seonwang (Dae In-su) from another branch seized power and laid the groundwork for later prosperity. a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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